함창협동조합과 전준한 이야기

대한민국 사회적경제의 퍼스트 펭귄, 함창협동조합과 전준한 이야기

어떻게 최초의 민간협동조합이 상주 함창에서 태동했는가.
이런 궁금증을 쫓다 보면 상주 함창에선 전준한(1898~1967)이란 인물을 만나게 됩니다.

경상북도 상주 함창협동조합은 대한민국 민간 협동조합 발상지로 당시 일제강점기에 피폐한 농민들의 삶을 증진시키고자
일본 유학 지식인들의 '협동조합운동사'가 추진되고 마침내 1927년 1월 경북 상주(상주시 함창면 오사리 215번지)에서
전준한 선생 주도로 대한민국 민간협동조합이 시작되었습니다.

함창협동조합을 시작으로 협동조합은 순식간에 김천과 군위, 안동나아가
충청도와 경상남도 등 전국으로 확산되었습니다.

읽어주는 함창협동조합 무빙툰

‘퍼스트 펭귄’ 함창협동조합과 전준한 이야기

1927년 1월 만들어진 상주함창협동조합은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협동조합이다. 어떻게 최초의 민간협동조합이 상주 함창에서 태동했는가. 조합을 구성한 주요인물은 누구인가. 그들은 왜 협동조합을 했는가. 어떤 방식으로 조합을 운영했으며, 그 성과는 어떠했는가. 이런 궁금증을 쫓다 보면 상주 함창에선 전준한(1898~1967)이란 인물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전준한을 탐색하다 보면 전진한(1901~1972)을 만나게 된다. 전진한은 일본 유학시절 협동조합운동사를 주도했던 인물로, 우리나라 초대 사회부 장관을 역임했다. 전준한과 전진한은 친형제 간이다. 전준한 역시 협동조합운동사의 일원이었다. 그러니깐 일본의 전진한과 상주의 전준한의 연결고리는 ‘협동조합운동사’였다. 따라서 협동조합운동사의 가치, 정신, 목표 등은 상주함창협동조합에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짐작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렇게 협동조합운동사를 들여다보면, ‘한빛’이란 조선 유학생 친목단체의 존재를 알게 된다. ‘공명정대’란 뜻의 한빛 아래 4개의 연구회가 있었고, 그 중 하나가 협동조합운동사라는 것을 알게 된다. 한빛은 1924년에 조직되었고, 전진한은 협동조합 연구 모임에서 주도적으로 활동했다. 1926년 협동조합 연구 모임은 협동조합운동사로 이름 짓고, 본격 활동을 시작한다. 그리고 이듬해 상주 함창에서 첫 조합 결성이란 결실을 맺는다.

정리하면 한빛-협동조합운동사로 분화된 조선 유학생 연구회에 전진한이 있었고, 전진한은 그의 형 전준한과 실전 협동조합운동을 논의하고, 전준한이 상주 함창에서 실천함으로써 최초의 민간협동조합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전준한은 이것을 실현하기 위해 함창군 일대를 순회 선전하는 동시에 각 동(洞) 유력자 30여 명의 발기인을 모집한 후 약 1개월간 준비했다. 마침내 그해 1월 14일 발기인 총회를 개최했는데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발기인은 전원 불참하고, 노인 7~8명만이 출석했을 뿐이다. 전준한이 발기인 몇몇을 직접 찾아가 ‘왜 마음이 바뀌었냐’고 묻자, ‘가난한 자들은 무능한데, 누가 그들을 믿고 거액을 투자하겠냐’는 매몰찬 답변이 돌아왔다. 하지만 전준한은 농민 8명과 함께 발기인 총회를 치렀다.

이때 전준한이 포기하지 않은 것은 신심(信心)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건 일본 유학 당시 뜻을 같이한 유학생들과 세계협동조합 모델들을 탐구했던 덕분이었다. 이를 통해 영국을 제외한 독일, 벨기에, 프랑스, 러시아, 스위스, 덴마크, 이탈리아, 아일랜드 모두가 국토가 뜯기고 헐린 극난(極難)한 전시경제 속에서 어렵게 협동조합운동을 시작했고, 끝내 성공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또 가장 모범적인 영국의 협동조합 역시 처음엔 28명의 조합원과 조그마한 구멍가게에서 몇 푼어치 일용품을 판매하면서 출발했다는 것도 알았다.

전준한의 협동조합은 발기인 총회 이튿날, 조합원 전원이 출동해 진력을 다해 조합원을 모집했다. 수일 만에 60여 명을 모집했다. 석유 한 두레박, 성냥 약간, 소다 한 통을 사서 시작한 영업은 기대 이상이었다.

함창시장 한 구석에 3원짜리 월세 사무실도 한 달도 안 돼 마련했다. 그해 5월에는 여자야학을 열어 경비 일체를 부담, 40여 명에게 교육의 장도 마련해 줬다. 이쯤 되니 ‘함창협동조합을 모방한 협동조합이 각지에서 봉기’했다. 1930년대 들어 그 수만 100여 개에 이르렀다. 더 이상 좌시할 수 없었던 일제가 1933년 해산명령을 내리면서 협동조합 조직은 와해수준으로 접어들었지만, 전준한은 때를 기다리며 신념을 버리지 않았다. 해방 후, 한국전쟁 중엔 협동조합법을 마련하기도 했다.

  • 전준한은 협동조합의 의의를 다음 3가지에 찾았다.
    • 협동조합운동은 자본주의 제도의 결함에서 산출된 각종 사회운동의 하나의 형태이다.
    • 경제적 약자가 상호부조의 협력에 의하여 그들의 경제적 향상을 기도하며, 자본주의의 결함을 배제하려는 사회 이상을 가지고 발생한 경제적 조직체이다.
    • 협동조합은 그 내용에 있어서 여러 가지의 형태를 포장하고 있으나 즉 소비, 신용, 생산, 판매, 이용 등의 조합이 이것이다.
  • 또한, 전준한의 협동조합운동에서 큰 의미를 지니는 것은 조직 운영에 있다.
    1. 1. 출자는 일인일구(一人一口)주의(유산자의 전횡방지)
    2. 2. 배당은 이용액에 따라(잉여금배분의 공평)
    3. 3. 매매는 시가현금주의(소자본의 운전민활)
    4. 4. 빈인은 출자불입 유예(사업의 대중화)
  • 이 원칙은 현대의 협동조합과 비교해도 뒤처지지 않는다. 어느 것 하나 변변치 못했던 상황에서도 성공적으로 협동조합을 운영할 수 있었던 것은 협동조합 정신을 준수하려는 각오가 남달랐기 때문으로 보인다.

*출처 : 상주함창협동조합 설립 90주년 기념 『‘퍼스트 펭귄’ 전준한 이야기』(경상북도, 한국콘텐츠연구원)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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